영화 <사도>가 개봉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나 지났나요??
헌데 저는 그동안 보고 싶은 마음에 시달리느라 일주일이 한달같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ㅎㅎ
뭐 어쨋거나, 그래서 이 조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화 <사도>를 보러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몇가지 사건들을 정리해봤어요^^
(물론 몰라도,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만..^^;;)
정치적 균형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시작한 탕평책..
하지만 숙종의 탕평책은 사실 명목상의 탕평책에 불과!!!
사실 "탕평책"이라고 하면 영조보다는 "정조"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탕평책은,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때부터 실시되었고, 다만 숙종 당시의 탕평책은 편당적 조처.. 다시말해 명목상의 탕평책에 불과했죠.
(그러다보니 숙종 당시의 탕평책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으로 왕이 주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노론의 일당전제화로.. 그리고 경종대의 신임사화와 영조대의 정미환국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영조의 탕평책..
과연 어떤 방식, 어떤 결과로!?
사실 숙종의 탕평책은 오히려 노론의 일당전제화를 가속화시켰고, 그로인해 숙종 말, 왕위계승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립을 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경종대에 왕세제인 영조가 경종을 대신해 세제청정을 하는 문제 역시 극심한 대립을 야기했는데요, 사실상 경종의 죽음 이후, 영조는 "형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게 되고, 그와 함께 정통성 논란으로 평생을 시달리게 되지요.
(결국, 이러한 압박감이 "임오화변(사도세자사건)"을 야기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비극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겠죠)
어쨋거나, 이러한 불안한 상황들 속에서 왕이 된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교서를 발표, 붕당의 균형을 회복하려 했으나, 이 역시 영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기에 오히려 더욱 불안만 가중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이인좌의 난을 경험하게 되는 영조는, 탕평책을 "당파심이 강한자를 제거한다"는 방식으로 진행, 결국 왕과 탕평파 대신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죠.
* 영조의 탕평비
"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며,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영조는 위의 문구를 친히 지어 비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 위에 세웠으며 이를 탕평비라 하였습니다.
영조는, 당파심이 강한 자를 배제, 새로운 세력집단으로서의 탕평파를 육성하였는데요, 이 과정에서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산림"의 존재를 부정, 붕당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서원을 대폭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조전랑의 권환을 약화시켰는데요, 사실상 이조전랑의 권한 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후임자 천거권"은 정조 대에야 완전히 폐지되게 됩니다.
사실, 영조의 탕평책은.. 그저 영조가 왕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의.. "일시적" 억누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면적 탕평책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도 노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나주괘서사건, 그리고 "임오화변(사도세자사건)"을 통해 소론을 완전히 축출하게 되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됩니다.
* 나주괘서사건은??
나주괘서사건은, 소론인 "윤지"가 노론의 공격으로 영조 즉위년, 나주로 유배되는 것을 원인으로 합니다.
윤지는 20여년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나주목사 이하징과 모의, 민심을 동요시킬 의도를 가짖고 나라에 대한 비방글을 대자보에 써서 나주객사에 붙이게 되는데요,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허나 이후,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 윤혜, 김도성 등도 역시 비방글을 쓰고 체포,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요,사실상 그 죄목은 "역모"이며 이 사건의 결과 소론은 사실상 거의 몰락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도세자 사건(임오화변)!!!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되면서, 노론의 일당전제화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노론을 적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는데요, 그로인해 노론은 사도세자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됩니다.
게다가 노론의 힘을 얻어 왕이 된 영조의 입장에서는 노론을 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이 시작되게 되는데요, 노론은 나경언으로 하여금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영조에 상소하게 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게 만드는데요 이 사건을 임오화변, 사도세자 사건이라 부릅니다.
* 임오화변 후 노론은 다시 벽파와 시파로 대립!!
임오화변으로 소론이 거의 제거된 상황에서 노론은 다시 벽파와 시파로 대립하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인정하지만 죽음 자체는 너무 과했다는 의견의 시파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벽파의 대립으로 말이죠.
("시파"를 노론 온건파, "벽파"를 노론 강경파라 부릅니다)
나름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본다고 쓴 글인데, 쓰다보니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 많아진 듯 보이네요~^^;;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붕당정치"!!!
사실상 정치를 함에 있어서 당파가 나뉘고, 그 대립이 이어지는 것은 어느정도 필요하기도 하며, 또 순기능을 가지기도 하죠~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이어지다보면, 조선시대, 숙종대 이후에 확인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들처럼 불거지게 되기도 하는데요~ 이를 숙종도, 영조도, 정조도 나름의 "탕평책"으로 끊어보려 했다는 점을 기억하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세 왕의 탕평책은 그 성격이 전부 다 달랐고, 결국 모든 탕평책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결론 ㅠㅠ)
영화 <사도>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후 8일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서 우리는 분명히, 당파간의 치열한 대립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어떻게 극단적으로 몰아갔는지 역시 보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내용들을 몰라도 영화를 보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도대체 왜~ 영조는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 당시의 상황이 어느정도였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면, 위의 내용을 어느정도 알고 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감사합니다.